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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 비밀문서(독일0

인천혁신교육 선구자 2013. 6. 19. 09:25

맨몸으로 민주화 시위에 나섰던 스물여섯 살의 대학생이 경찰관의 총에 맞아 숨졌다. ‘우파정부의 주구(走狗)’ 경찰이 죄 없는 젊은이를 죽이다니!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격렬한 데모가 이어졌으며 결국 정권이 좌파로 교체됐다. 1967년 6월 2일 옛 서독에서 벌어진 일이다. 반체제 좌익운동인 68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유명하다.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등 당시 학생운동에 앞장섰던 68세대는 우리나라의 386세대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 ‘문제의 경찰’ 카를하인츠 쿠라스가 옛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의 스파이였음이 지난해 확인됐다. 알고 보니 동독의 ‘공작’에 놀아난 서독 학생들이 나라를 뒤흔들었던 셈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슈타지는 9만1015명의 직원을 거느리며 동독에 17만3081명, 서독에 1553명의 첩자를 두었다고 한다. 이들이 서독 정부와 정보기관까지 침투한 건 물론이다.

▷1974년엔 현직 총리 빌리 브란트의 보좌관 귄터 기욤이 슈타지의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동서독 정상회담을 두 차례나 한 동방정책의 기수가 브란트다. 기욤은 성실한 사민당원으로 지내다 총리 측근이 된 뒤 활약을 개시한 ‘잠자는 스파이’였다. 더 큰 충격은 독일 통일 뒤 슈타지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터져 나왔다. 평소 웃고 떠들며 흉허물을 나눴던 친구가, 동료가, 심지어 남편이나 아내가 바로 밀고자였던 것이다. 영국의 BBC는 인구 6.5명당 1명이 스파이였다고 보도했다.

▷1980년대 말 남한 인사들이 옛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다는 슈타지의 문건이 입수됐다. 이를 발굴한 미국 우드로윌슨센터의 번트 셰이퍼 선임연구원은 “북한이 남한에서 온 부자(父子)에 대해 ‘남반부에 있는 동지들’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남한에서 암약한 조선노동당원이나 고정간첩일 수 있다”고 밝혔다. 문건 속 인사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여권번호는 지워진 상태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모른다. 남북이 통일돼 북한의 비밀문건이 백일하에 공개되는 날, 바로 우리 곁에서 북의 첩자들이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얼굴로 진지전(陣地戰)을 펴고 있었음이 밝혀질지도.

 

 

 

 

 

 

 

 


4.1
 베를린 장벽 붕괴와 몰락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인 1989년 11월 9일 이후 슈타지의 존재 가치는 급속도로 하락했다. 며칠 뒤인 13일에 총수 에리히 밀케가 동독 인민의회에 나타나 그 동안의 악행을 변명하려고 했지만, '저는 그럼에도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Ich liebe doch alle Menschen!)' 라고 하자마자 의원석에서 휘파람과 욕설이 쏟아져 나오면서 역관광당하고 말았다. 이 장면은 동독 텔레비전에 의해 생중계되었다(…).

동독의 높으신 분들은 밀케의 굴욕에도 불구하고 슈타지를 존속시키려고 했는데, 밀케 퇴진 후 한스 모드로프 총리는 슈타지를 '국가안보청(Amt fur Nationale Sicherheit)'이라고 개명했다. 하지만 모드로프의 아이디어도 마찬가지로 동독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위기감을 느낀 상부에서는 12월 초에 본부와 각 지부에 기밀 문서들을 파기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이 명령이 밖으로 새나가면서, 도처에 있던 슈타지 지부들이 시민들에게 털리기 시작했다.[4] 12월 4일에 에어푸르트 지부를 시작으로 불과 1주일도 안되어 동독 내 거의 모든 지부가 시민들의 손에 장악되었고, 이런 와중에 파기되지 않았거나 손상이 미미한 문서들도 대부분 시민들에게 빼앗겼다.

결국 동독 정부는 시민들의 항의와 압박에 굴복했고, 모드로프는 1990년 1월 11일에 여야 모두가 참가한 원탁회의 석상에서 국가안보청의 존속 없는 해체를 선언했다. 4일 뒤인 15일에는 동베를린에 있던 본부도 시민들에게 점령당하면서 슈타지의 역사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현재 슈타지가 남긴 모든 현존 기록물들은 BStU(연방국가안전부기록물보존소)[5]에서 관리하고 있다. 참고로 모 지부에서는 시간이 급박하여 손으로 일일이 찢어서 폐기했으나, 독일 정부는 그 찢긴 문서 조각도 모두 자루에 담아서 보존하고 있다. 해당 지부의 보존/복구 책임 담당자는 10년동안 조각모음 해서 8포대 해치웠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4.2 

판도라의 상자 


위에서 말한대로 시민들에게 순식간에 털리는 바람에 대부분의 기록물이 파기가 되지 못했다. 이 기록 때문에 동서독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이익을 봤다. 서독보다는 동독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는데, 양심적으로 알려졌던 인사들이 슈타지의 정보원이었음이 들통나서 망했어요. 특히 동독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고, 동독 체제의 붕괴에 앞장섰던 인사들마저도 슈타지 부역 전력이 드러나 정계를 물러나야만 했다. 동독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동독 기독민주당 당수 로타르 드 메지에르조차도 물러나야만 했던 것이 그 증거다.

그리고 인권 탄압을 명령했거나 실행했던 동독 인사들은 대부분 감옥에 갔다. 에리히 호네커와 에곤 크렌츠는 동독 체제 당시 내렸던 월경인들을 사살하라는 명령때문에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유명한 피겨 스케이팅선수인 카타리나 비트나 서울올림픽 여자 100m 금메달리스트 카트린 크라베 또한 슈타지 파일 때문에 곤혹을 치뤘다.

그러나 이런 과거 청산 작업이 옛 동독지역에 정치보복으로 비춰져, 동독지역에서 옛 통일사회당(공산당)의 후신인 좌파당(Dle Linke)이 득세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또한 구동독 지역측에서는 이런 서독의 "정치보복"때문에 동독체제를 대한 재평가해야한다는 여론도 많다.[6]

대한민국에서도 필시 이런 역사가 재연될 것으로 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안전보위부 문서를 손에 넣을 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주로 동독 주민들의 감시와 비폭력적인 공작이 주업무였기에 처벌에 한계가 있었던 슈타지와 달리 국가안전보위부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학살, 고문, 탄압 등 북한정권이 저지른 각종 반인륜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기에 독일처럼 가볍게 처벌받고 끝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따라서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은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복수를 피하고자 철저한 문서 소각 및 파기를 강행하고 그들 자신도 북한주민들의 분노를 피해 신분을 감춘 채 잠적할 가능성이 커 남은 문서는 대부분 반인륜 범죄와 간첩 등의 사안과 무관한 사소한 것들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설사 남한에 뭔가를 넘겨준다고 쳐도 남한 내 북한 간첩 명단 같이 자신들이 상을 받으면 받았지 처벌을 받을 일은 없는 것들만 넘겨줄 것이다.

 

 

 

 

 

 

 

 

 

대충 요약하자면 독일이 통일후 간첩인 명단인 슈타지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독일 국민들을 경악하게 만들만큼 의외에 서독 인물들이 동독의 스파이로 밝혀짐.

 

우리도 나중에 통일되서 간첩인명단이 공개되면..엄청난 파장이 예상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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