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주의 청산으로 새로운 문화 창조
관료주의란 인간을 사물처럼 관리하는 방법이며, 값싸고 쉽게 통제하고, 수치화하기 위해서 사물을 질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양적 관점에서 취급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관료주의적 절차는 통계적 자료에 의해서 수행된다. 관료주의자들의 행동은 통계적 자료를 기초로 한 경직된 규칙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들 앞에 서 있는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자발적인 반응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건을 대하면서 통계적 빈도에 따라서 해당 문제를 결정하면서 5%~10%의 소수가 치르는 희생을 묵살한다. 그들은 자신이 짊어져야 할 개인적인 책임이 두려워서 규칙의 뒤로 도피처를 찾는다. 그들에게 확신과 자긍심을 부여하는 것은 규칙에 대한 충성심이지, 인간성의 명령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다.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인 아이히만은 관료주의자의 극단적인 표본이었다. 그가 수십만의 유대인을 죽음의 가스실로 보냈던 동기는 유대인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심이 아니었다. 그는 그 누구도 증오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규칙에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규칙을 어겼을 때에만 죄책감을 느꼈다. 관료주의자의 1차적 특성은 인간적 공감의 결핍과 규칙이라는 우상에 대한 비합리적 숭배이다. 그렇다고 모든 관료주의자들이 아이히만과 같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대다수 관료적 지위에 있는 사람의 경우 그들이 지닌 인간적 측면을 완전히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료주의자들 가운데는 아이히만 부류의 인간도 적지 않다, 다만 그들은 수천 명의 인간을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는 여건에 놓여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만약 병원에 근무하는 어떤 관료주의자가 환자는 반드시 의사의 처방을 거쳐야만 한다는 규정을 내세워서 중환자의 치료를 거절했다면, 그의 행동도 아이히만의 경우와 다를 바 없을 것이며, 또는 자신이 몸담고 일하는 관료주의적 규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회보장 제도의 수혜자를 굶어 죽도록 방치하는 공무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료주의적 태도는 행정관리들에게 만 있지 않고 의사, 간호사, 교사와 교수들, 아내를 대하는 남편들, 자식을 대하는 부모들에게도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도 한낱 수치로 제한된 경우를 상대할 때면, 진짜 관료주의자는 극도로 잔인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 그 행위에 버금갈 정도로 그들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상대방과 묶는 인간적 공감과 유대가 없기 때문이다. 관료주의자들은 노골적인 사디스트보다 혐오감을 덜 일으키기는 하지만, 실상 더 위험한 존재들이다. 왜나면 그들은 양심과 의무 사이의 갈등조차 일으키는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이란 곧 의무이행과 동의어니까 말이다. 공감과 동정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은 그들에게는 없다. 우리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교육할 때 관료주의적 접근 보다는 휴머니즘적 접근으로 그들의 성장을 도울 수는 없을까? 특히 그들이 학교 규칙을 어기며 우리들의 말에 순수하게 따르지 않았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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